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드쿤 크비슬링 (문단 편집) === [[매국노]]가 되다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크비슬링 히틀러.jpg|width=100%]]}}} || ||<#ddd> [[아돌프 히틀러]]와 악수하는 크비슬링[* 크비슬링 왼쪽에 [[파울 베게너]] SS대장, [[요제프 테르보펜]] SA대장이 있다. 히틀러 오른쪽에는 [[한스 라머스]] SS대장, [[율리우스 샤우브]] SS대장, [[마르틴 보어만]] SS대장, [[알베르트 보어만]] NSKK중장이 있다.] ||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당일인 1940년 4월 9일, 크비슬링은 공영방송국인 [[NRK]]를 점거한 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데타]]를 선언하고 스스로 정부 수반에 올랐음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방송 중계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쿠데타]] 선언이었다. 비드쿤 크비슬링은 히틀러와 이미 두 차례나 면담한 적이 있기 때문에 히틀러와 독일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쿠데타는 독일의 침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독일은 크비슬링이 노르웨이인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고 혐오감만 준다는 것을 포착, 크비슬링이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해 그의 신정부를 6일 만에 해산시키고 폴 베르그 대법원장이 임명한 행정위원회를 새로운 통치기관으로 내세웠다. 크비슬링의 정적들은 역으로 크비슬링이 독일의 사주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생각했으나 독일에선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정도를 제외하면 크비슬링에 주목한 인물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비롯한 독일 외무부는 그를 적대적으로 보고 있었다. 4월 15일 행정위원회는 크비슬링으로부터 정식으로 권력을 양도받으며 크비슬링에게 위기를 잘 대처해줘서 고맙다고 감사를 표하는 등 뻘짓을 하다가 국왕이 4월 17일 스웨덴에서 망명정부만이 정식정부이며 행정위원회를 불법이라고 선포하는 바람에 역시나 망해버렸다. 결국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직접 통치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4월 21일 요제프 테르보펜을 국가판무관으로 파견했다. 또한 4윌 24일에는 행정위원회를 대신할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가 수립되었다. 히틀러는 테르보펜에게 크비슬링이 직접 정부를 구성하게 하라고 했지만 테르보펜은 이 지시를 무시하고 국민연합당 정부를 구성하고 국왕을 폐위, 국민연합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산했다. 크비슬링은 국민연합당 위원장이었으나 아무런 권력도 없었다. 하지만 테르보펜의 정부 역시 제대로 돌아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고 테르보펜과 크비슬링의 권력 다툼이 이어졌다. 결국 1942년 1월 23일, 테르보펜은 크비슬링이 정부를 구성하게 허락했다. 2월 1일 아케르스후스 성에서 크비슬링은 정식으로 노르웨이의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내에는 [[노르웨이 국민정부]](이하 [[크비슬링 정권]])가 수립되었고, 노르웨이 자치 정부의 총리로 임명된 비드쿤 크비슬링은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다. 노르웨이 청년들을 독일군에 보냈으며, 반항적인 인사를 숙청하고, 노르웨이의 유대인들은 나치에 넘겨주어 노르웨이에 있는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42년 9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조사에 따르면, 노르웨이 국민의 '''95%'''가 크비슬링에 반대한다고 나왔다. 노르웨인 민중은 크비슬링과 독일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독일에 항거하는 테러가 벌어지자 나치의 노르웨이 주재 국가판무관이었던 요제프 테르보펜은 크비슬링으론 안되겠다고 판단, 크비슬링을 통치 행위에서 배제하고 노르웨이 주둔군 사령관 팔켄호르스트와 함께 노르웨이를 직접 통치했다. 이때부터 노르웨이의 경찰력은 무력화되고 게슈타포들이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크비슬링은 히틀러에게 권력을 더 달라고 징징대긴 했으나 그 이후로도 여전히 독일에 충실히 협력했다. 하지만 이는 크비슬링에 대한 적대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943년 8월 군나르 에일리프센이란 형사가 크비슬링 정부의 노동법을 위반한 두 여자를 체포하길 거부하여 8월 9일 체포되었다. 테르보펜이 이 형사에 대한 처벌을 요구, 만약 노르웨이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자신의 군대가 나설 것이라고 위협했다. 크비슬링은 8월 14일 1902년 군법을 소급 확장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려 경찰에게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도록 법을 고쳤고 에일리프센을 인민법정에 세운 후 처형했다. 이렇게 [[파시즘]]적 독재를 펼친 크비슬링에 대해 전 노르웨이는 분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